2009년 2월 11일 수요일

색 잘 쓰는 남자, 여자가 되자


“섹시하다”는 말은 최근에 주가가 놀랄 만큼 급상승한 어휘 중의 대표주자이다. 섹시하다는 것은 오늘날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그 사람의 장점이요 개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심지어 섹시하지 않는 사람은 뭔가 중요한 결격사항을 지닌 것으로 취급당하기까지 한다. 세상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섹시”라는 말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색기(色氣)”라고 할 수 있다. “색기”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색을 쓰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1) 남녀가 육체적으로 교접하다 (2) (속되게) 성적 교태를 부리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섹시하다”는 말은 “색기가 넘친다” 정도로 옮겨져도 하등 지장이 없어 보인다. 국어사전에 속된 표현이라고 한 것은, 성을 폄하하고 괄시하고 금기시했던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잔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색기를 머금은 것이나 발산하는 것이나 휘두르는 것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전혀 금기시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왜 하필 “색(色)”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본능을 겉으로 발산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성(性)”이지만, 그것을 드러나게 발산하게 되면 “색을 쓰는” 것이 된다.

색! 색이 무엇인가? 색이란 물질화된 세상의 모든 면면을 가리킨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반야심경의 핵심 구절을 보라. 색은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 현상을 가리킨다. 그래서 굳이 해석하자면 이런 뜻이 된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텅 빈 근원에서 나왔고, 눈에 보이지 않는 텅 빈 근원은 곧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에 다 배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을 창조주라 하든, 하느님이라 하든, 부처님이라 하든, 우주적 섭리라 하든, 그 근원 자체가 곧 물질이고 물질이 곧 근원 자체라고 풀이해도,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는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질문을 던져 보자. 색을 만든 이는 누구인가? 누가 색을 가장 썼는가? 빨주노초파남보, 하늘에 무지개를 걸어놓은 이가 누구인가? 세상의 온갖 꽃들로 하여금 원색의 화려한 빛깔로 벌 나비를 유혹하도록 섭리를 장치하고 베푼 이는 누구인가? 일찍이 세상을 창조하되 남녀로 창조하여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잉태하여 번성하게 한 이는 누구인가?

가만히 귀 기울이면 세상은 온통 “색 쓰는 소리”로 가득하다. 그렇게 색 쓰는 소리가 넘치도록 세상을 창조한 이가 누구인가? 세상을 온통 “색 쓰는 소리”로 가득하게 한 이에게 만약 “당신, 너무 속되다”고 한다면, 그분은 어떤 표정을 하실까?

색을 금기시하고 속된 것으로 폄하하는 것은 창조주를 모독하는 짓이고,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짓이며, 우리 자신의 가치를 내동댕이치는 짓이다.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은 색에서 나온 것이고, 색이 없으면 온 우주는 무색무취의 진공상태로 채워질 것이다.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세상을 자신의 팔레트 삼고 캔버스 삼아 멋진 빛깔의 잔치를 펼치신 위대하신 분의 손길에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삶을 삶답게 사는 길이라면, “색 잘 쓰는 남자, 여자”가 되어야 한다.

색에 미친 “색광”이라 할지라도 근본을 따지자면 그리 나무랄 일이 아니다. 조물주가 의도한 바대로 빠져든 결과이지, 조물주에 반기를 든 결과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색에 빠진 사람은 색을 잘 쓰는 사람일 수 없다. 색을 사용하는 주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색의 노예가 되는 것은, 창조주의 성품이 깃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저버리는 일인 것이다.

“색을 잘 쓰는 남자, 여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안에 깃든 신의 성품을 발현하여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창조주로서의 우리 자신을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몸으로 마음으로 체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유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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